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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이 오랫동안 황폐하고 또 한일합병 이후에는 파훼(破毁) 변모되었던 데에 비하여 창덕궁(昌德宮)은 비교적 옛 모습을 많이 보전할 수 있었다. 그것은 광무 11년(1907)에 순종이 즉위하고 이어(移御)를 위하여 많은 수리를 하였으며 그 해 11월에 덕수궁에서 이어한 후로 시종(始終) 창덕궁에 거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융희 4년(1910) 8월 29일에 대권을 일제에게 넘겨 준 후로는「창덕궁전하(殿下)」라는 허울 좋은 호칭을 얻었을 뿐이니 궁중에도 서산낙조 같은 쓸쓸함이 감돌았다. 연초가 되면 선정전(宣政殿), 인정전(仁政殿) 등 건물에서 친족과 일제 관인들과의 하례(賀禮)의 자리를 베풀고 봄 가을이면 정원에서의 관앵회(觀櫻會), 후원(後苑)에서의 습율회(拾栗會) 등 행사가 있지만 망국의 우수(憂愁)를 해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1917년 겨울에는 이러한 창덕궁에 다시 큰 화재가 일어나 실의에 차 있는 왕가를 당황하게 하였다. 즉, 이 해 11월 10일 오후 5시경에 대조전(大造殿) 서쪽으로 연접되어 있는 나인 갱의실(更依室)에서 불이 일어나 강한 바람을 타고 번지는 불길이 내전 전부를 태우니 큰 재변이 아닐 수 없었다. 순종과 황후 일행은 후원 연경당(演慶堂)으로 피하고 불은 8시경에 소진(消鎭)되었는데 그 동안에 대조전을 위시하여 흥복헌(興福軒), 통명문(通明門), 양심각(養心閣), 장순문(莊順門), 희정당(熙政堂), 찬대실(贊待室), 내전창고(內殿倉庫), 경훈각(景薰閣), 징광루(澄光樓), 옥화당(玉華堂), 정묵당(靜默堂), 요화문(曜華門), 요휘문(曜暉門), 함원문(含元門) 등 선정전 이동(以東)의 많은 건물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그리고 내전(內殿)에 수장하였던 귀중품 및 훈기(勳記), 훈장, 휘장(徽章), 기념장(記念章) 등까지도 모두 소실되었다.
진화(鎭火)와 함께 순종 일행은 연경당(演慶堂)에서 인정전(仁政殿) 동행각(東行閣)으로 이어(移御)하여 가침소(假寢所)를 성정각(誠正閣)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14일에는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 민병석(閔丙奭) 등이 모여 처리대책을 숙의한 결과 우선 가전(假殿)을 낙선재(樂善齋)로 정하고 응급수리비로 예비금 중에서 65,000원을 지출하기로 하고, 새 전각을 짓되 한식(韓式)에 양식(洋式)을 참작한 건평 약 700평에 대한 건축 및 설비비 등으로 546,300원을 계상하여 1919년까지 준공하기로 하였다.
또 동(同) 27일에는 중건하는 전각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강녕전(康寧殿), 동행각(東行閣), 서행각(西行閣), 연길당(延吉堂), 경성전(慶成殿), 연생전(延生殿), 응지당(應祉堂), 흠경각(欽敬閣), 함원전(含元殿), 만경전(萬慶殿), 흥수전(興壽殿) 등의 건물을 헐어 그 구재(舊材)를 사용하기로 정하니, 여기서 중건계획은 진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註10]
그런데 이 창덕궁 화재에 이어서는 또 이듬해 여름에 고종이 종환(腫患)으로 여러 달을 고통하는 일이 생기어 궁중을 더욱 우수에 잠기에 하였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그 보다 84년 전인 순조 33년에 같은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많은 전각이 화재를 입고 뒤이어 순조가 종환으로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으며 고종은 그러한 전례를 들어서「내 병이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교(下敎)하기까지 하였다. 일찍 어머니(명성황후(明成皇后))의 참변을 당하고 부왕(父王)과 서로 의지해 지내며 평소 효성이 지극하던 순종은 친히 시탕(侍湯)하고 조석(朝夕)으로 부축 보양(保養)하여 가을에 가서는 종처(腫處)가 치료되기는 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고종은 원기가 쇠약해지고 그 해 겨울(1919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註11]
또한 중건(重建) 도중에는 고종의 승하와 인산(因山), 3 · 1만세운동 등 궁중, 국중의 큰 일이 잇달았던 관계였던지 창덕궁 여러 전각의 중건공사는 예정보다 1년이 늦은 1920년 겨울에야 준공(竣工)을 보게 되었다. 이때 중건된 건물은 대조전(大造殿)을 위시하여 희정당(熙政堂), 흥복헌(興福軒), 경훈각(景薰閣), 함원전(含元殿) 등 건평 800평에 달하는 여러 전각이었다. 그 중 대조전에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백학도(白鶴圖),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의 산수도(山水圖),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의 산수도(山水圖), 정재(靜齋) 오일영(吳一英) ·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의 봉황도(鳳凰圖)가, 희정당에는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의 금강산도(金剛山圖)가 장치(裝置)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전의 중건 공사가 끝난 이듬 해에는 다시 창덕궁 후원 북일영(北一營) 자리에 새로 선원전(璿源殿)을 짓고, 구 선원전에 봉안(奉安) 하였던 태조 어진(御眞)과 구 영희전(永禧殿)의 세조 · 원종 어진, 구 선원전의 숙종 · 영조 · 정조 · 순조 · 문조 · 헌종 어진, 구 천한전(天漢殿)의 철종 어진,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의 고종 어진을 함께 봉안하기도 하였다. [註12]
그런데 대조전이 중건된 후 5년이 지난 1926년 4월에는 이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여 창덕궁을 다시 한번 애도와 울분의 분위기로 감싸이게 하였다.
승하하기 전 해부터 순종은 발을 잘 못쓰고 때로 부종(浮腫)이 있기도 하였는데 1926년에 들면서는 다시 소화가 잘 안되고 배가 부른 증세가 생겼으며 4월부터는 신구(新舊) 의사의 치료도 효과 없이 병세가 점점 더하여 25일 아침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따라서 26일에는 일제의 궁내성(宮內省)에 의하여 궁중상(宮中喪)이 포고되고 이어 국장(國葬) 거행이 알려지니 다시 한번 우리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을 가지게 되었다. 궁중에는 내외의 조문객들이 드나들고 돈화문 앞에는 호곡 애통하는 국민들로 가득찼다. 마지막 임금의 상사(喪事)를 당한 서울의 거리는 모두 봉도일색(奉悼一色)이요 지방에서도 많은 조곡(弔哭)의 인파가 밀려들어 다시 한 번 우리의 애국구국의 염원을 보여주었다. [註13]
순종의 승하로 인하여 망국의 서러운 회포에 잠기고 또 대일감정의 자극이 충만하던 시기에 일어난 송학선의사(宋學善義士)의 재등총독(齋藤總督) 자살거사(刺殺擧事)는 순종의 국상과 함께 창덕궁 주변에서 일어났던 큰 사건이었다. 또한 6월 10일 인산(因山) 때에는 영여(靈轝)가 창덕궁을 떠나 봉결식장(奉訣式場)인 훈련원(지금 서울운동장)에 이르고 훈련원에서 다시 금곡릉(金谷陵)으로 가는 도중에도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註14]
한편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秘苑)은 북한산의 지맥인 응봉(鷹峰)의 동남쪽에 자리잡았는데 6만여평의 넓은 면적에 높고, 낮은 동산이 연이어 있고 소나무, 잣나무, 밤나무, 참나무 등 각종 수림이 울창하며 여기 저기 작은 연못과 맑은 냇물이 곁들여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다시 영화당(暎花堂), 주합루(宙合樓),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연경당(演慶堂), 부용정(芙蓉亭), 농수정(濃繡亭), 승재정(勝在亭), 존덕정(尊德亭), 폄우사(**愚**), 애연정(愛蓮亭), 서향각(書香閣) 등 많은 누정(樓亭)이 사이사이 있으니 그 풍경, 그 운치 이를데 없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정면 6간, 측면 2간의 연경당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상류계급의 가옥 형식을 취한 것이며, 갑신정변 때에는 고종이, 1917년 대화재 때에는 순종이 임시 피어(避御)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비원의 건물들도 일제 때에 비교적 잘 보존되었으며 순종 재세중(在世中)에는 때로 이 비원에서 종실(宗室) · 외빈(外賓)들을 접대하는 연회를 가지고 또 가을철이 되면 많은 밤나무에서 떨어지는 아람을 줍는 습율회(拾栗會)를 가졌으며 황제가 때로는 측근인들을 데리고 비원으로 나가 밤을 줍고 따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근시(近侍)들을 데리고 나가 잘 익은 밤을 많이 따 들였는데 근시들은 그 밤을 나누어 주기를 기다렸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알고 보니 평소 효성이 지극한 순종은 그 잘익은 밤을 모두 부황(父皇)이 계신 덕수궁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비원에 얽힌 한 일화(逸話)가 될 것이다. [註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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