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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昌慶宮)은 일찍이 성종 15년(1484)에 왕이 조모(祖母)인 정희왕후(貞憙王后), 모후(母后)인 소혜왕후(昭惠王后), 예종비(睿宗妃) 안순왕후(安順王后)를 위하여 짓고 자주 나가 뵈며, 조신(朝臣)들을 연회(宴會)하기도 하던 궁궐이었던 만큼 창덕궁과는 담장을 격하여 있고 또 후원은 서로 통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창덕궁과 창경궁은 때로 그 경계가 모호하게도 되고 또 전각의 소재처가 서로 출입함을 볼 수도 있다. 융희 원년(1907) 11월에 순종황제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 후로도 이 창경궁은 자주 황제의 산책소요(散策逍遙)하며 또 빈객(賓客)을 접견하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창경궁 경내에 동물원 식물원 등의 설치 동기도 창덕궁에서 우울하게 기거하는 순종황제의 관람 위안을 위하여서였던 것도 그러한 실지를 말하여 주는 것이다. 한편 1910년 일제에 강점당한 후에는 이 궁궐도 많은 수난을 겪었다. 명정전(明政殿) 남북 행각(行閣) 이외의 경내에 있던 모든 행각과 궁문(宮門) · 궁장(宮墻)이 철훼(撤毁)되고 심지어는 궁전의 초석(礎石)까지도 파내어 홍화문 안 구(舊) 어구(御溝)의 제방으로 사용하는 등 세인의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경내의 고건물로는 명정전과 통명전(通明殿), 경춘전(慶春殿), 환경전(歎慶殿), 양화당(養和堂), 함인정(涵仁亭), 집옥헌(集玉軒) 등 몇몇 건물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새로이 춘당대(春塘臺) 위 높은 언덕에는 박물관이, 시민당(時敏堂) 옛 터 부근에는 표본실이, 전의 권농장(勸農場) 터에는 연지(蓮池)와 수정(水亭)이 새로 생겼다. 또 선인문(宣仁門) 안쪽 전의 보루각(報漏閣)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동물원이, 춘당대 일부는 식물원이 배치되어 일반 시민의 관람장소로 바뀌었다. [註16] 그 중에도 순종의 창덕궁 이어와 함께 설계 건축이 진행되던 박물관 본관이 낙성된 것은 1911년 1월이었는데, 이 박물관의 건축과 함께 각지로 관계자들을 파견하여 고미술품 등의 수집도 행하였다. 따라서 본관이 낙성됨과 함께 다시 창경궁 옛 건물 명정전, 경춘전, 양화당 등 전각(殿閣)도 수리해서 진열관으로 충당하여 도자기, 금속품, 옥석류(玉石類), 조각, 서화, 목죽기(木竹器), 무기(武器), 불상, 기타 역사 풍속에 관한 물품, 자료 1만 수천점을 각각 시대별로 진열하여 순종과 왕실은 물론 일반에게도 공개, 관람시켰다. 이 무렵 1914년에는 전라남도에 파견되었던 이왕직사무관(李王職事務官) 말송태언(末松態彦)에 의하여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에 있는 고려고요(高麗古窯) 유지(遺址)에서 많은 불완전 도자기 및 파편 등이 채집 수장되기도 하였다. 이 박물관은 창덕궁박물관 또는 이왕직박물관으로도 불리어 졌는데 1936년에 덕수궁미술관이 신축됨과 함께 소장품이 모두 이장되었다. [註17] 한편 동물원은 처음 순종황제가 동물기르기를 좋아하여 명정전 부속건물에 곰을 쇠사슬로 묶어 기른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전해올 만큼 순종황제가 옆 궁궐인 창덕궁에 거처한 후에 출발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개원 후에도 각처의 진귀한 동물이 계속 들어왔으며 1922년경에는 30여종의 짐승, 50여종의 새, 그 중에 학 표범 등이 알을 까고 새끼를 낳으며 또 인도산의 길이 3m 60cm에 달하는 큰 뱀과 성성(猩猩), 남양산(南洋産)의 번이라는 물새도 들어와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1945년 7월 태평양전쟁이 고비에 달하였을 때에는 이러한 동물원의 많은 동물들, 그 중에서도 거수(巨獸), 맹수에 속하는 코끼리, 사자, 호랑이, 곰, 뱀, 악어, 독수리 등 150여마리에 달하는 동물들이 폭격당할 때 사람을 해칠 위험이 있다는 구실로 일본인 관리자들에 의하여 독살되었던 사실은 창경원사상의 하나의 큰 참사였던 것이다. [註18] 그리고 식물원에도 식물원 본관과 온실 등이 이루어지고 전국 각지에서 채집한 희귀식물은 물론 남양 방면에서 들어온 고무나무, 바나나, 야자수 등의 열대식물이 가득차 그 수가 1천여종 1만여 그루에 이르렀다. 또 원내(苑內)에는 일본인들이 일본에서 많은 벚꽃나무를 가져다 심어 봄철이 되면 창경원의 벚꽃은 한 명물이 되었으며, 1924년부터는 다시 600여개의 전등을 달아 불야성(不夜城)을 이룬 가운데 야간 공개를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봄철이 되면 창경원은 이러한 진귀한 동 · 식물과 벚꽃 구경에 고궁, 고미술 관람을 겸한 남녀노소의 관광객이 경향(京鄕)에서 모여들어 번잡이 극에 달하니 창경원은 고궁이 아닌 관광지 유흥지로 변하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에 게재된 아래와 같은 기사는 관광지 창경원의 일면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18일은 아침부터 창경원을 향하여 물 밀어오는 노소 남녀의 사람 물결 가운데로 달아드는 자동차와 인력거가 함께 섞여 헤쳐나가지도 못할만치 복잡이 되는 광경을 이루었다. 그 원내(苑內)의 광경을 보고 보면 꽃우산을 길 좌우 옆에 세워놓은 듯이 쬐이는 볕도 가리워 주며 먼지 바람도 막아주는 듯한 가운데로 가벼운 봄옷을 입고 사뿐 사뿐 걸어가고 걸어오는 청춘남녀는「에덴」의 낙원을 일시 이 세상에 나타내는 듯하였다. 당일의 창경원 관람자 수효는 실로 28,000명에 달하여 창경원이 생긴 이래로 처음 가는 성황을 이루었더라.(1920년 4월 19일자)
작일은 일요일이라 엿샛동안 괴로운 살림에 몰두하던 일반은, 손님을 기다리는 창경원의 웃는 꽃, 우는 새를 찾으려 하여「배우개」로 들어가는 넓으나 넓은 길에는 남녀노소의 구경꾼들이 줄줄이 늘어서게 되었다. 평시 보다 더 늘인 마흔 다섯채의 전차(電車)도 구경꾼을 미처 수용치 못하여 창경원 들어가는 배우개 네거리에는 대혼잡을 일으키어, 전에 없던 교통순사까지 출동하여 질서를 정돈하게 되었다. 전차는 끊일 사이 없이 땀이 흐르게 분주하되 대해중(大海中)에서 한 방울 물을 덜은 듯이 아무 가감(加減)이 없이 길 바닥에는 사람의 천지였다. 이 구경꾼들의 수효는 얼마나 되나, 일전에는 하루 종일 들어온 구경꾼이 5천명에 지나지 않던 것이, 놀라지 말라, 작일(昨日) 아침부터 정오까지 들어간 수효가 1만 2천여명이나 된다 한다. (1923년 4월 16일자)」멀티미디어자료    신문발행허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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