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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德壽宮)은 고종이 21년간 거처하던 곳이며 또 마지막 임금 순종이 즉위한 곳으로서 조선 말기 역사와 가장 사연 많은 고궁이었다. 이러한 관계는 또 을사조약 후 고종이 지방지사(地方志士)들에게 밀조(密詔)를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화란(和蘭)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밀사를 보내던 사실들과도 이어진다. 그러한 일들은 또 고종의 승하와 함께 수많은 민중들이 대한문(大漢門) 밖에 모여들어 호곡(號哭)하고 나아가서는 3 · 1만세운동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덕수궁이야말로 조선왕조의 비애 얽힌 수난사와 함께 이 겨레의 머리 속에 가장 많은 인상을 남긴 왕궁이다. 또 군민간(郡民間)의 이러한 환난을 이겨내려는 노력과 함께 많은 일화, 비화(秘話)가 전하여지기도 한다. [註19]
한편 일찍이 광무 8년(1904) 4월에 함녕전(咸寧殿)으로부터 큰 불이 나서 많은 전각이 소실된 후, 내외 국사가 경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곧 궁의 중수(重修) 개건(改建)을 명하여 동(同) 10년까지 이르는 사이에는 많은 전각의 중건을 보게 되었으며 이때에 이룩한 건물을 포함한 많은 전각들이 대개 한일합병 전후까지 보전되었는데 당시의 중요건물은 아래와 같다.
「중화전(中和殿) 함녕전(咸寧殿) 덕홍전(德弘殿) 석어당(昔御堂) 가정당(嘉靖堂) 즉조당(卽祚堂)(전(殿)) 준명당(浚明堂)(전(殿)) 수인당(壽仁堂) 정관헌(靜觀軒) 영(녕)복당(永(寧)福堂) 흥덕전(興德殿) 수옥헌(**玉軒) 선원전(璿源殿) 돈덕전(敦德殿) 의효전(懿孝殿) 만희당(晩喜堂) 경효전(景孝殿) 흠문각(欽文閣) 환벽정(環碧亭) 강태당(康泰堂) 석조전(石造殿)」
그러나 광무 11년의 고종 폐위(廢位) 및 융희 4년(1910) 한일합병으로 국세가 크게 기울어짐과 함께 궁궐 안의 많은 전각 문루 등이 차례로 헐리어 1935년경에 와서는 대한문(大漢門), 건극문(建極門), 포덕문(布德門), 생양문(生陽門), 용강문(用康門) 등의 궁장(宮墻) 문 안으로 중화전, 함녕전, 덕홍전, 석어당, 즉조전, 정관헌, 준명당, 양심당, 구여당, 석조전 등의 일부 건물만이 여기 저기 남게 되었다. [註20]
그리고 전각(殿閣), 문루(門樓) 등이 헐린 사이 사이에는 화단(花壇)과 초장(草場)을 만들고 잔디와 작약(芍藥), 모란 등을 심어 새로운 경관(景觀)을 이루며 이 동안 1913년 봄에는 경성일보 사장 길야태좌위문(吉野太左衛門)이 길야루(吉野樓) 500주(株)를 진상하여 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3년부터는 궁내를 일반에게 공개 관람하게 하니, 이제는 시민들의 소풍 산책하는 고궁으로 화하였다.
또 종래 황실의 귀빈 접대시 사용되던 석조전은 일제 미술품의 진열 전시장으로 바뀌어지며, 1936년 3월에는 다시 석조전 서쪽으로 미술관 신축공사를 착수하여 1938년 8월에는 연건평 1,000여평의 미술관을 이룩하고 창경궁박물관 소장의 미술품, 고고학자료 등을 옮겨 수장 전시하여 일반의 인기를 모으기도 하였다. 또 일반공개가 시작됨과 함께 여기 저기에 매점, 휴게실 등이 생기니 고궁의 인상은 차츰 희미하여지게 되었다. 또 1921년에는 창덕궁 화원에 새 선원전(璿源殿)이 이루어짐과 함께 중화전에 봉안(奉安)되었던 고종의 어진(御眞)도 옮겨가니 덕수궁과 고종과의 깊은 관계도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註21]
멀티미디어자료
   
덕수궁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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