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慶熙宮)·운현궁(雲峴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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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德壽宮)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옛 궁궐 경희궁(慶熙宮)은 일찍이 고종시대에 운교(雲橋)를 두 궁 사이에 가설하고 황제가 자주 거동한 바도 있었지만 융희 3년(1909)에 이미 궁궐 서쪽에 일본인 중학교(전 서울중학교)가 건립된 바 있었고, 1911년 6월에는 그 토지와 건물 전부가 총독부에 이관되어 왕궁 재산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아직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과 각 회랑(廻廊) 등이 남아 있었는데, 그 후 총독부의 방매(放賣)로 남은 왕궁건물은 모두 헐리고 기지(基地)도 분할, 이탈되었다.
즉, 1926년에는 숭정전(현재 동국대 정각원(正覺院)), 회상전이 헐리어 지금 필동 3가(당시 대화정 3정목)에 있던 일본인 사찰 조계사(曹溪寺)로 옮겨 영건(營建)되고 흥정당은 장충동2가(서사헌정(西四軒町))의 광운사(光雲寺)로, 흥화문은 장충동의 박문사(博文寺) 문간으로 옮겨졌으며 궁지(宮址)도 1925년에 전매국(專賣局) 관사(官舍) 등 대지로 동쪽의 21,500평이 잘려나가고 1927년에는 다시 남쪽 도로에 면한 일부가 분매(分賣)되었다. [註22]
한편 고종 즉위와 함께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또 민비(閔妃)와의 권세 다툼으로 하여 풍운이 항상 감돌던 운현궁(雲峴宮)은 한일합병 후에도 큰 변동 없이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노당(二老堂) 등의 옛 건물이 대원군 사당과 함께 남아 있었다. 대원군의 사자(嗣子) 흥친왕(興親王) 이재면(희)(李載冕(喜))이 계승하여 오던 궁의 관리는 1911년에 흥친왕 별세와 함께 아들 이준용(李埈鎔)에게 이어졌다. 이준용의 서세(逝世)와 함께 그가 후사가 없으므로 의친왕의 제2자 이우(李)가 계후(繼後)하였으며 이우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세상을 떠난 후로는 부인 박찬주(朴贊珠)가 흥친왕비(興親王妃)와 함께 두 아들, 이청(李淸), 이종(李淙)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註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