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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군왕(君王)을 봉사(奉祀)하는 종묘는 국권이 일제에 넘어간 후에도 큰 변동은 없었다. 또 1921년에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와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의 부묘(**廟), 1928년에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와 순명황후(純明皇后)의 부묘가 있었지만 전의 건물을 이용하여 신위(神位)를 모신 것이니 만큼 수리, 신장(新粧)이 있었을 뿐 새로운 건축은 없었다. 다만 고종, 순종은 모두 파란많은 조선 말기의 임금이요 또 그 후로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였던 만큼 국민들의 거기에 대한 감회는 전의 어느 임금의 부묘의(**廟儀) 때와는 다른 바 있었다.
그 중에도 고종은 처음 위호(位號) 문제부터도 이왕직(李王職)과 일반사회에서는 황제를 주장한데 대하여 일제측은 양위(讓位) 후 이태왕(李太王)의 칭호를 가하였으니 황제의 위호가 부당하다 하여 부득이 고종대왕(高宗大王)으로 하고 신주(神主)와 명정(銘旌), 지석(誌石)에도 모두 대왕의 칭호를 쓰게 하였다. 그러나 이듬 해에 육소(陸所) 비석(碑石) 건립문제가 일어남과 함께 비석에 새길 위호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태극교(太極敎) 같은 데서는 창덕궁과 총독부에 글을 올려 황제 칭호를 요청하고 결국 그것이 일본정부 요로(要路)에까지 전달되어 마침내는「고종태황제」로 타결을 보기도 하였던 만큼 그 부묘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매우 컸던 것이다. [註24]
따라서 3년 상기(喪期)가 지난 1921년 3월에 고종황제, 명성황후의 부묘의식(**廟儀式)이 결정됨과 함께 민족지 동아일보는 3월 3일자로「효덕(孝德) 경효양전(景孝兩殿) 부묘성의(**廟盛儀)」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기사를 실었다.
「무정한 세월이 흐르는 듯하여 대한문전(大漢文前)에 통곡을 한지 이미 3년이 지났으며 금곡가로(金谷街路)에 대여(大轝)를 봉송(奉送)한지 어느덧 2주년을 당하였도다. 창덕궁 효덕전에서는 음력 2월 초정(初丁)의 길일(吉日)을 선택하시와 담제(炬祭)를 거행한신 후 이로써 3년간의 상례(喪禮)를 마치시고 음력 2월 22일에는
효덕전(孝德殿)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영위(靈位)
경효전(景孝殿)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영위(靈位)
양위(兩位)를 종묘에 뫼시는 부묘식(**廟式)을 거행하옵신 터이라 이 예식은 비유하기는 황송하오나 사가(私家)로 치면 삼년상(三年喪) 후 사당에 신주(神主)를 조성하고 길제(吉祭)를 지내임과 다름이 없는 바이라. 그러므로 왕가에 당하여는 실로 경사로우신 큰 의식이라. 이 의식 거행 후에 고종조(高宗朝)의 양위(兩位) 존영(尊靈)이 역대왕을 뫼시고 종묘에 존좌(尊坐)하시와 영원무궁히 이왕가(李王家)를 진호(鎭護)하옵시리로다.」
기사 내용이 감상적이요 또 왕가에 대한 존경의 예를 다하였음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달 말경에 있을 부묘의식의 절차와 행렬 · 제례 등에 대하여도 자세히 적어서 보도하고 또 관계기사를 연일 실어서 일반 사람이 부묘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였던 만큼 부묘일을 앞두고 지방에서도 연일 수천명의 인파가 서울로 올라 오고, 3월 29일에는 오후 2시부터 습의(習儀)가 진행되었는데 창덕궁, 종묘, 덕수궁을 연결하는 종로 정동 일대에는 인파가 밀려 대성황을 이루고 수많은 차비원(差備員), 종척귀족(宗戚貴族)과 별배구종(別陪驅從)들의 습의행렬(習儀行列)이 지나는 곳에는 여러 가지 깃발, 채색 연(輦)이 주악에 맞추어 행진하여 길 양쪽을 꽉 메운 수많은 배관자(拜觀者)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은 다시 30만 시민이 참관하는 가운데 정착, 신위(神位)를 종묘로 이안(移安)하는 장엄한 행사가 있었으며 뒤 이어 오후 7시경에는 순종이 친히 관원들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서 전알(展謁)하고 보책(寶冊)과 보인(寶印)을 감실(龕室) 안에 모시는 등의 일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31일 0시 30분을 기하여 부묘의식을 거행한 후 양위의 위패를 봉안안 다음 부알대제(**謁大祭)를 엄숙히 거행하였다. 뒤 이어서는 다시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사도세자(思悼世子))와 헌경의황후(獻慶懿皇后)의 신위를 영녕전 제15실로 옮기어 모시는 조천의례(**遷儀禮)를 거행하고 다시 장조(莊祖)의 다음 실(室)에 봉안하였던 정조 신위부터 차례로 올려 봉안하니 여기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위는 제18실로 이봉(移奉)되었으며 제19실은 후일 순종과 순명황후의 신위를 모시게 되었다. [註25]
한편 이러한 부묘의식과 함께 또 고종조의 묘정(廟庭) 배향대신(配享大臣)으로
영의정(領議政) 박규수(朴珪壽)
〃 신응조(申應朝)
좌찬성(左贊成) 이돈우(李敦宇)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을 정하여 함께 묘정배향(廟庭配享)의 의식도 거행하였다. 그리고 후일 순종, 순명황후의 부묘와 함께 다시
좌의정(左議政) 송근수(宋根洙)
참정(參政) 서정순(徐正淳)
을 묘정배향하니 이것이 종묘신위 봉안의 최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종묘에는 정전(正殿) 19실에 48신위가 봉안되고 영녕전 15실에는 31신위가 봉안되었다. 또 종묘의 현판(懸板) 문자가「창엽문(蒼葉門)」이었는데 그「창(蒼)」자,「엽(葉)」자는 28군(君), 28세(世)의 자형(字形)이어서 벌써 왕세자 이은(李垠)까지 조선의 국운이 28세에 끝날 것을 예견한 것이라 전하여 오기도 한다. [註26]
한편 역대 임금의 사친(私親)으로 원종(元宗)의 어머니 인빈 김씨(仁嬪金氏)(저경궁(儲慶宮)), 경종(景宗)의 어머니 희빈 장씨(禧嬪張氏)(대빈궁(大嬪宮)), 정종(貞宗)의 어머니 정빈이씨(靖嬪李氏)(연우궁(演祐宮)), 영조(英祖)의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崔氏)(육상궁(毓祥宮)), 장조(莊祖)의 어머니 영빈 이씨(**嬪李氏)(선희궁(宣禧宮)), 순조(純祖)의 어머니 수빈 박씨(綏嬪朴氏)(경우궁(景祐宮)) 등 6궁의 신위를 합사(合祀)하여 6궁(六宮)으로 통칭되던 궁정동(宮井洞), 전의 육상궁(六祥宮)에는 1929년에 다시 덕안궁(德安宮)(현 조선일보사)의 순빈엄씨(淳嬪嚴氏) 신위를 봉안하여「7궁(七宮)」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순빈엄씨는 후궁으로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지나고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을 무렵부터 고종을 모시게 되어 경운궁(덕수궁)에서 조선 최후의 황태자였던 영친왕(榮親王)(이은(李垠))을 탄생하였다. 1912년에 세상을 떠나자 사묘(私廟) 덕안궁(德安宮)을 세우고 봉사(奉祀)하였는데 이때 와서 7궁에 합사(合祀)하게 된 것이다. [註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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