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文廟)·관왕묘(關王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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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동에 있는 문묘(文廟)는 동양의 대성(大聖) 공자와 그 제자들 및 후대의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현(儒賢)들을 종향(從享), 배향(配享)하는 곳으로 처음 태조의 한양전도(漢陽奠都)와 함께 창건되고 임진왜란 후에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묘의 대성전 앞에 명륜당을 지어 유생들의 학문을 강론하고 윤리를 천명(闡明)하는 곳으로 삼았던 것으로서 전의 숭교(崇敎)의 방명(坊名), 오늘의「명륜(明倫)」의 동명(洞名)이 모두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 옛날에는 이곳이 향시(鄕試)에서 합격한 선비들이 모여 동 · 서재(東 · 西齋)에 유숙하며 수업하기도 하던 국가 최고학부의 성균관(成均館)이기도 하였던 곳이다. 역대의 문인, 학자가 대개 이 성균관 수업을 거쳐 관계(官界)에 진출하였으며, 유학(留學) 중에도 그들에 대한 국가적인 대우나 위치는 상당하였다.
1910년 우리 나라가 일제에 침탈된 후에도 문묘, 명륜당(明倫堂) 등 건물은 큰 변동이 없고 때로 약간의 수리공사가 있었을 뿐이다. 또 매년 2월, 8월의 상정일(上丁日)을 택하여 거행하는 대제향(大祭享)인 석전(釋奠)도 그 시일을 1937년부터 양력의 4월, 10월의 15일로 바꾸었을 뿐 그대로 거행되었다. 한때는 일제에 의하여 일본의 대유(大儒)라고 하는 이궁존덕(二宮尊德) · 중강등수(中江藤樹)를 합사(合祀)하자는 의논이 있기도 하였지만 실현은 보지 못하였다.
다만 종전 성균관으로 통칭되던 이곳을 경학원(經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30년 봄부터는 경학원에 한문, 유학을 전수하는 명륜학원(明倫學院)을 부설하니 이것은 종전 국가 최고 교육기관에 대한 격하(格下)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명륜학원은 후에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에 성균관대학으로 개편되었다. [註28]
한편 중국의 명장(名將), 성장(聖將)으로 전해지는 한나라의 관우(關羽)(자(字) 운장(雲長))를 봉사하는「관왕(關王)(제(帝))묘(廟)」도 임진왜란 때 건설된 후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 중에도 남대문밖 도동에 있는 남관왕묘(南關王廟) 속칭 남묘(南廟)는 선조 32년(1599)에 구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 등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동대문 밖에 있는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선조 33년 명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의 하사금(下賜金) 4,000근과 많은 사람들의 의연(義捐)으로 지어졌으며, 그 밖에도 지방과 서울 여러 곳에도 관왕을 제사드리는 묘우(廟宇)가 있었다.
특히 동관왕묘 즉 동묘(東廟)는 대지 2,300여평 위에 305평의 건물이 있고 관왕의 목상(木像)이 봉안(奉安)되었는데 건물의 평면에도 특색이 있지만 지붕의 형상이 진기하고 복잡하여 다른 곳에서 찾아 보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하며 1931년에는 보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남묘나 동묘는 모두 국가에서 춘추(春秋) 봉사(奉祀)하였는데 융희 2년(1908)에 국가 사전(祀典)이 폐지된 후로는 주민과 관성교인(關聖敎人)들에 의하여 향사(享祀)와 수호(守護)가 계속되었으며 매년 음력 4월 8일에는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참관하기도 하였다. 동묘에는 융희 3년(1909)의 서묘(西廟) 즉 숭의묘(崇義廟)를, 1913년에 북묘(北廟)를 합사(合祀)하기도 하였으며 성균관 북쪽 전의 송우암(宋尤菴) 구기(舊基)에 있던 북묘의 소상(塑像)과 묘정비(廟庭碑)가 옮겨지기도 하였다. [註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