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社稷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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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 원년(1987) 10월 고종이 황제 위(位)에 나아감과 함께 일시 종래 국사(國社), 국직(國稷)의 신위(神位)를 태사(太社), 태직(太稷)으로 고쳐 모시고 향사(享祀)한 바도 있었지만 국력의 미약(微弱), 국위(國威)의 부진과 함께 이 사직단의 지위도 차츰 격하되었다. 그리고 한일합방으로 이 나라의 국권이 아주 실추됨과 함께 국가에서 거행하던 사직단 제사도 폐지되었으며 1911년 2월에는 건물과 기지(基地)가 모두 총독부로 인계되었다.
그리고 1922년 10월에는 경성부에서 종래의 사직단 경내 15,179평에 다시 인접지역인 누상동(樓上洞)과 필운동(弼雲洞)의 임야 일부를 포함한 총 66,000여평의 면적에「사직단공원」의 설계를 하였다. 따라서 경내에 작은 정자, 벤치, 휴게소와 조명등이 설치되고 새로이 단풍, 벚꽃나무 등이 심어져 일반에게 공개되니 다시는 그 옛날 국가 향사(享祀)의 신성지(神聖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작은 규모의 구조이지만 형태가 색다르고 우아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는 단(壇)의 표문(表門)이 지금도 남아 국보 257호로 지정되어 있고 단(壇)의 유지(遺址)조차 분명하지 않은 전의 사직경내는 고적(古蹟)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註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