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奬忠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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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奬忠壇)의 창설은 광무 4년(1900)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국한 장병들을 제사드리게 되었으며 후에 다시 창선(彰善) 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랴는 육군법원장 백성기(白性基)의 제청에 의하여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까지도 함께 단사(壇祀)의 열(列)에 참여하게 되니 여기서 장충단의 향사(享祀)하는 신위(神位)는 문무의 많은 충신 열사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융희 4년(1910) 8월에 일제에 의하여 장충단은 폐사(廢祀)의 불운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장충단에 향사하는 신위(神位)는 모두가 일제 침략에 항쟁하던 인물들이었음에랴?
따라서 사전(祠殿)과 부속건물들은 고목 사이에 덮여 있고 당시 황태자이던 순종의 정면 큰 글씨와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건립 연유를 새긴 비석은 대일감정을 악화시킨다는 구실로 일제에 의하여 남산 숲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919년 6월부터는 이 부근 일대를 경성부에서 관할하는 공원으로 만들고 벚꽃 수천그루를 심었다. 뿐만 아니라 서쪽 산 밑에는 다시 일본인 삽택청연(澁澤靑淵)의 송덕비(頌德碑)와 소위「육탄삼용사(肉彈三勇士)」의 동상을 세워서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여 버리려 하였다. [註32] 이 어찌 지나는 이들의 한탄할 일이 아니었으랴? 3 · 1운동 48인 중의 1인인 우정(偶丁) 임규(林圭)의 아래와 같은 장충단시(奬忠壇時) 또한 그러한 심정의 일면을 말한 것이다.

「단(壇) 앞에 눈물 떨구어 돌 위에 이끼 덮인 것이,
두어번 어루만지다 대(臺) 위로 올라간다.

밤마다 혼령(魂靈) 계시니 밝은 달과 함께 하올 것이
해마다 한식(寒食)때 되면 자규(子規)가 와서 울고 간다.

지난 날 이곳의 일들 모두가 아득한 옛적인데
지금 누가 찾아와 술 한잔을 부어드리나.

시(詩)를 다 읊고나서 숲 속에 앉아 있으니,
단풍나무 푸르고 검은 사이로 석양(夕陽)이 기울어진다. [註33]